곤지암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수원의 수원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집이 멀기에 수원에서 자취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숙집에는 큰방 하나 중간방 하나 작은 방 하나가 있었다. 자취방을 잡던 날 나는 모르는 누군가와 같이 방을 써야한다는게 무서웠어서 작은방을 혼자 쓰기를 고집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작은방을 내준다고 하셔서 작은 방이 비어있는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3학년이 되는 선배가 작은방을 양보한 것이었다.

 

하숙방에 입주한 날은 입학식 전날이었다. 큰방과 중간방에 선배들이 있었는데 난 선배들이 무서워서 작은 방에 들어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있는데 선배들이 왔다갔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 부스럭 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나와 같은 하숙집에는 3학년 김진배 선배, 2학년 이광호 선배, 2학년 신원섭 선배가 있었고 동기 이동근이가 있었다. 진배형은 음악을 사랑하는 선배였고 교지 편집부였다. 항상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학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선배였다. 광호형은 진배형을 끊임없이 존경하는 선배였고 늘 자신은 뭔가 모자라다고 생각하며 뭔가 잘하는 사람에 대한 감탄을 잘 늘어놓던 선배였다. 원섭형은 키가 작았지만 강단이 있었고 자존심도 강하고 지는걸 싫어하는 선배였다. 동근이는 시골 양아치같은 인상이었지만 제법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고 뭔가 자신이 드러나는걸 좋아하는 친구였다. 나랑 성격이 잘 맞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부딛히는 면이 있지 않아서 그럭저럭 친한 관계로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입학식 전날 나는 배가 아프고 감기에 걸렸다. 입학식이 있던 날 학교 앞에는 교복 홍보하는 사람들과 학원 홍보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입학식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많은 선생님들이 우리학교는 거의 100년이 되어가는 수원 최고의 명문학교라는 것만을 강조했던 기억이 어렴풋 난다. 반면 하숙집 선배들은 학교 건물이 안무너지는게 다행이라고 강조했다. 전통과 명예를 빼면 우리학교는 무너진다고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입학식 때 교장선생님은 수원에 새로 지어서 시설 좋은 학교가 많지만 우리학교는 수원 한복판에 있어서 땅값이 엄청나다고 그래서 우리학교도 땅팔고 딴데로 이사가면 수원 인문계에서 제일 시설이 좋은 학교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당시 우리들 사이에서는 학교가 땅팔고 이사가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 글을 쓰는 2014년 현재까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나는 1학년 12반이었다. 12반은 1층 중에서도 가장 끝에 (지하 매점 바로 윗층) 전에는 전년도만 해도 창고로 쓰던 곳이 교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교실은 넓었다. 담임 선생님은 지구과학을 가르치시던 선생님이었는데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잊기 전에 일단 써두는데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영어담당 송봉규 선생님,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국사 담당 조성운 선생님 이셨다.

 

나의 첫 짝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키가 자고 뭔가 이상하게 생긴 친구였다. 그 친구는 내 옆에 앉아서 수원 학생들의 일상적인 삶과 각종 안내를 많이 해줬다. 나중에 나랑은 성격이 잘 맞지 않아서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고 그 친구는 점점 불량한 친구들과 (당시 표현으로 노는 애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더더욱 나랑은 관계없는 친구가 되었다.

 

수원으로 고등학교를 오면서 가장 먼저 느낀 문화적 충격은, 이곳에서는 농구가 엄청난 인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 전국적으로 농구가 인기긴 했다. 농구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농구대는 늘 붐볐다. 난 농구를 전혀 할줄 몰랐으니까 농구를 좋아하는 친구들과는 어울릴 수 없었다. 나중에 나도 뭔가 또래 집단과 어울리기 위해 밤마다 농구를 연습했다. 이러고 보니 나도 꽤 기특한 면이 있었구나.